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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이두원 기자= "수십년 축구화 팔면서 한 번도 하자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지금도 품질에는 자신 있죠. 그치만 다들 메이커를 좋아하지 이런 걸 신으려 하진 않아요. 그래도 알아봐주시고 '내 발에 꼭 맞다', '신어 보니 괜찮다' 하는 말을 들으면 뿌듯하죠. 그만 접으라는 말을 수백번 들으면서도 이걸 못 놓는 이유인 것 같네요."

서울 동대문구 한 켠의 세 평 남짓한 작은 가게에서 축구화를 만들고 있는 김봉학(53) 사장은 국내 유일의 맞춤형 수제 축구화 장인이다.

나이키나 아디다스 등 유명 브랜드에 비하면 규모 면에서 초라하지만 그가 만든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신발은 '신창축구화'라는 이름으로 40년 넘게 세상과 만나고 있다.

소위 '메이커'로 대변되는 브랜드 축구화가 보급되기 전까진 그래도 국내에서 직접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축구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지금은 하나 둘 사라져 이제는 김봉학 사장이 유일하게 그 업을 지키며 이어가고 있다.

국민학생이었던 1974년, 모두가 힘들었던 시절 먹고 살기 위해 대구의 한 공장에서 축구화나 야구화, 육상화의 철심을 박는 것으로 이 일을 처음 시작한 이래 벌써 4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큰 고비도 있었다. 브랜드 축구화의 홍수 속에 수익성이 떨어지자 동료들은 모두 일찍 업을 접고 다른 일을 찾아 떠났다. 그래도 그는 축구화 만드는 걸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20년 넘게 희귀병으로 병상에 있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더 악착같이 매달렸다.

그렇게 낮에는 축구화를 팔러 조기 축구회를 찾아다녔고, 밤에는 아내가 받아놓은 축구화 수선 일을 새벽까지 하면서 버티고 버텼다.

손 재주가 남달라 수선 일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었지만 그는 그 돈을 다시 새 축구화를 만드는 것에 투자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새 축구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그 때는 정말 힘들었는데 힘들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어요. 여기 저기 찾아다녀도 한 두 컬레 팔기도 힘든 시절이었지만 '이거 좋네, 내 발에 딱 맞네' 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 만큼 좋은 게 없더라고요. 몇 시간 못 자고 일하면서도 힘이 났죠. 그 즐거움에 지금껏 버틴 것 같아요."

지금은 그래도 입소문을 타고 그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축구화를 의뢰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그의 축구화를 한 번 구입한 사람들은 1년이든 2년이든 꼭 그의 가게를 다시 찾는다. 실용적이고 자신의 발에 꼭 맞기 때문이다.

"사람의 발은 안 그래 보여도 차이가 많아요. 엄지 발가락 옆부분이 튀어나온 사람도 많고, 크기가 양쪽이 다른 사람들도 있어요.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분들도 있고요. 그런 분들에게 꼭 필요한 축구화죠."

물론 단골이 많아졌다고는 하나 예나 지금이나 외면 받기는 마찬가지다. 브랜드 축구화가 아니다 보니 B급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어느날엔 축구 하는 아들을 데리고 한 아버지가 그의 가게를 찾았지만 결국 퇴짜를 맞았다. 누군가는 그의 신발이 좋아 사겠으니 대신 아이다스나 나이키의 로고를 박아달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 결국엔 그냥 돌아갔죠. 쪽팔린다는 거였어요. 뭐 한 두 번 있는 일이 아니니.(웃음) 그런 걸 보면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 그래도 믿고 찾아와주시는 거에 감사하죠. 내 신발에 메이커 로고를 박아달라고, 그러면 사겠다고 하는데 그건 정말 못 하겠더라고요"

난감함도 여러 번이었지만 김 사장은 품질 하나 만큼은 지금도 자신이 있다. 브랜드 축구화에 비교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껏 수십년간 자신이 만든 신발을 팔면서 한 번도 별로다, 하자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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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년에는 북한에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우연한 기회에 중국에서 훈련하던 북한 17세 이하 청소년 여자 대표팀에 축구화를 기증한 게 인연이 됐다. 당시 북한 청소년 대표팀은 그의 축구화를 신고 뉴질랜드에서 열린 17세 이하 FIFA 월드컵에서 미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북한 대표팀이 FIFA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하니 북에서 저한테 공식적으로 제안이 왔어요. 직접 초청을 받아 북한을 방문했고, 그쪽 기술자들을 데리고 중국에서 기술을 전수해줬어요. 평양은 수제 축구화의 본고장이거든요. 오히려 그곳에 내가 축구화 기술을 전수한 것 자체가 내게는 큰 보람이었죠."

가게를 찾아간 날도 김봉학 사장은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동료 1명과 함께 본을 뜨고 고무를 자르면서 세상에 하나 뿐인 축구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 의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신창축구화를 널리 보급하는 것이다. 이제는 국내 마지막 남은 수제 축구화 장인이 된 그는 "사람들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품질 만큼은 자신이 있어요.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좋은 신발을 많이 보급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