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에 개봉된 할리우드 전쟁영화 《브레이브하트》는 13세기 잉글랜드에 맞서 싸운 스코틀랜드의 전설적인 영웅 윌리엄 월러스의 이야기였다. 감독과 주연을 맡은 멜 깁슨은 "어떤 정치적인 의도도 없으며 그저 재미있는 얘깃거리일 뿐"이라고 둘러댔다. 아마도 전 세계의 수많은 관객들이 깁슨의 말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현지에서 이 영화는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스코틀랜드 민족당의 전 당수는 "스코틀랜드인은 지금도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타당하다"고 했다. 공공의 안녕과 공공선에 대한 월러스의 사상이야말로 잉글랜드의 본성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스코틀랜드의 정신이자 현재 시민 민족주의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반면 "지나치게 야성적인 민족으로 그려내고 신화에 집착한 탓에 스코틀랜드를 제대로 알 기회를 가로막았다" "민족 자신의 실패를 타자(잉글랜드)에 전가해 혐오감에 의한 애국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그 영화의 역사적 부정확성과는 무관하게 윌리엄 월러스는 어떤 역사 연구도 무효화할 수 없는 문화적·사회적 신념의 복잡한 상징이라는 것이다. '민족'에 대한 대중적인 상징과 신화는 시각적·문학적·연극적 재현과정을 통해서 현재의 관심에 맞게 재생산된다. 이미 《브레이브하트》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여러 경쟁 집단이 다양한 정체성과 정치적 목표를 위해 월러스를 '압축적 상징'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월러스를 소재로 한 여러 소설, 역사서, 시, 심지어 비디오 게임까지 나오고 있다. 이 재현물들은 스코틀랜드인의 민족 정체성에 대한 기존 관념들을 재생산·재해석한다.
1995년 개봉된 뒤 스코틀랜드에서 민족주의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킨 영화《브레이브하트》. /이후 제공
일련의 상징과 역사가 모아져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재현하는 과정이 대중문화에 의해 일상적으로 수행되고 있으며, 새로운 상징들은 끊임없이 발명되고 유포되면서 대중의 정서적 애착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렇듯 '대중문화'와 '민족 정체성'의 밀접한 연관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앞서 깁슨의 말에 동조하는 보통 독자들이라면 별로 상관 없다고 여기기 쉬운 요소들이다. 민족 정체성은 거대담론이나 고급문화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풍경이나 음식을 먹는 습관에서부터 관광, 영화, 음악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대상 안에 내재돼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0년 새천년을 기념해 영국 런던에 세워진 밀레니엄 돔에는 영국의 국민 정체성을 표현한 전시관이 만들어졌다. 그곳에는 빨간 공중전화 박스와 이층버스, 피시 앤 칩스 같은 음식, 제임스 본드와 비틀스 등 대중문화와 일상의 아이콘들이 촘촘히 자리잡고 있었다. 민족 소속감이라는 것이 권위 있고 공식적인 차원의 문화와 정체성으로부터 점차 탈(脫)중심화하고 있다는 예증이다.
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대 교수인 저자의 이 책에서 '오랜 역사적 경험의 공유와 혈통의 순수성'이 민족(nation)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기존의 믿음은 여지 없이 무너진다. 에릭 홉스봄의 시각처럼 19세기 국민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민족과 국민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며, 퍼포먼스와 군중집회, 상품에서조차 민족적인 요소가 새로이 창출된다는 것이다. 롤스로이스 자동차만 해도 '누구나 살 수 있는 대중적인 물건'이 아니라 '계급과 신분에 집착하는 영국 사회의 상품'을 상징하고 있으며, 안전감과 분별력에 중점을 둔 영국인들의 운전 습관과 연결돼 있다고 이 책은 분석한다.
초국적(超國的) 문화가 대세를 이룬 세계화시대에 대중문화에 내재된 민족 정체성이 과연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쉽다. 원제 National Identity, Popular Culture and Everyday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