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700m에 갇힌 칠레 광부들이 끝까지 버텨낸 것은 반드시 구조된다는 믿음 덕분이었을 것이다. 나라가 구하러 올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이들은 절망감에 미쳐버렸을지 모른다. 칠레 정부는 광부들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진짜 영웅은 칠레라는 국가 시스템 그 자체였다.
세계가 칠레발(發) 영웅담에 환호하고 있을 때 중미 온두라스에선 살인 혐의를 썼던 27세 한지수씨가 14개월 만에 풀려났다. 그가 무죄 판결을 받은 데는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선 한국 정부의 외교 노력이 컸다. 그러나 정부가 한씨를 도운 것은 체포 후 석 달이나 지나, 여론이 들끓은 뒤였다. 석 달간, 한씨는 침묵하는 조국을 얼마나 원망했을까.
한 나라의 국격(國格)을 가늠하는 기본은 자국민의 생명·안전을 지켜주려는 '국가 의지'다. 국민이 곤경에 처했을 때, 조국이 꼭 구해줄 것이라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 나라는 절대 국격 있는 나라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칠레보다 두 배쯤 잘 산다. 국격도 두 배 위일까.
1995년 보스니아에서 미군 전투기가 격추됐다. 엿새 뒤, 기적적으로 생존한 조종사의 SOS가 미군 무전기에 타전돼 왔다. 미군은 즉각 적진 한복판에 특공대를 투입해 빗물로 연명하던 조종사를 구출해내고야 말았다.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더 큰 희생이 따를지 모를 위험한 작전을 강행한 것이었다.
미국이 자국민에게 약속하는 구호가 있다.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는다(You are not forgotten)'. 어떤 비용을 치르고라도 지구 끝까지 쫓아가 구해낸다는 원칙을 미국은 한 번도 버린 일이 없다. 미국민은 죽어서도 대접받는다. 미국은 북한에 돈까지 지급해가며 최근까지 6·25 전사자 유해 발굴을 벌였다.
1976년 이스라엘의 '엔테베작전'에 세계가 혀를 내둘렀다. 우간다에서 자국민이 인질로 잡히자 이스라엘 특공대가 무려 4000㎞를 날아가 아무도 예상 못한 구출작전을 성공시킨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자국민 한 명을 석방시키기 위해 팔레스타인 포로 수백 명을 풀어준 일도 있다.
그렇게 국민을 소중히 여기는 국가에 이스라엘 국민은 충성으로 화답한다. 전쟁이 터지면 이스라엘은 해외에 나간 청년들까지 귀국해 입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스로 총을 잡는 이스라엘과 군대 안 가는 편법이 난무하는 한국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될까. 국가가 국민을 대접하는 방식의 차이가 애국심의 차이를 낳은 것은 아닐까.
유조선 '삼호드림호'가 소말리아 해적에 피랍된 지 200일이 넘었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해적에 억류된 5명의 선원은 조국이 구해줄 것이라 확신하고 있을까. 필리핀에서 살인 혐의를 받고 5년간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는 조광현(35)씨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6·25 종전 이후 북한에 납치된 우리 국민 중 517명이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2004년 평양에 간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강하게 김정일을 밀어붙여 일본인 피랍자 8명을 데려갔다. 우리는 두 명의 역대 대통령이 두 번의 남북 정상회담을 열었다. 하지만 납북자문제는 의제로 다뤄지지조차 않았다.
엊그제 공개된 통일부 문건에 따르면 납북자 중 최소 22명이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돼 있다고 한다. 생지옥에 우리 국민이 갇혀 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사회는 분노도, 관심도 없고, 그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우리는 과연 정상적인 나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