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안전모를 쓰고 있지만 돌이 떨어지면서 팔과 얼굴, 등에 난 상처에 석탄가루가 박히면서 그 자리가 곪고 아물면서 석탄은 그대로 있었다. 광부 문신이다. 나는 몸에 박힌 석탄가루를 일일이 파내고 타월로 빡빡 문지르기도 했지만 지울 수 없었다. 지금도 내 얼굴에는 검은 점들이 검버섯처럼 남아있다.
그런 위험 속에서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희미한 헬멧의 램프에 의존해 하루 16시간씩 연장근무를 하며 탄을 캐냈다. 막장일은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구릭아우흐(Gl?jck auf)"라고 인사를 했을까. '죽지 말고 살아서 지상에 올라오라'는 뜻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국내로 보낸 돈이 당시 우리나라 외화수입의 3분의 1이 됐다니….
이렇게 힘든 3년이 지나 귀국을 앞둔 내게 독일 친구들 덕분에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인생의 두 번째 기회였다. 독일 국립사범대인 아헨교원대에 입학한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여전했고,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되어 강제 출국당할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파독간호사 출신 한 여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머나먼 타국에서 같은 고향사람을 만났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그녀를 보기 위해 40km나 떨어진 곳을 자전거로 왕복하면서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다. 2년 만에 우리는 황금커플이라는 '광부와 간호사'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고 주말이면 함께 된장국·청국장·김치찌개 등의 음식을 해 먹었다.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둘 다 아직 학생 신분인지라 집을 얻을 돈이 없어 처음에는 따로 살아야 했고, 간신히 합친 후에도 서로 학업과 생활에 바빠 아이를 독일인 가정에 맡겼다. 그러나 그만 사고로 생후 5개월 된 첫딸은 하늘나라로 갔다.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사랑을 제대로 베풀지 못한 죄책감에 서로 부둥켜안고 피눈물을 쏟았다. 나는 12년 만에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 귀국했다.
'교수가 된 광부.' 파란만장하다고도 할 수 있는 나의 삶이지만 어느덧 고희(古稀)가 됐다. 지금도 나를 일깨워주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이었다.
내가 일하던 함보른 탄광에 1964년 12월 대통령 부부가 찾아왔고 식순에 따라 애국가가 시작되자, 감격에 찬 광부와 간호사들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곧이어 울음바다가 됐다. "가난 때문에 이역만리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일하는 새까만 여러분 얼굴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까지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대통령의 연설에 우리는 울고 또 울었다. 육영수 여사도 한 사람 한 사람 껴안고 함께 울었다. 그날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기억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나를 또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