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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가수 휘트니 휴스턴.

미국 팝의 여왕 휘트니 휴스턴(48)이 사망했다. 그녀의 홍보 담당자 크리스틴 포스터는 12일(한국시각) “휘트니 휴스턴이 사망했다. 사망 원인과 장소는 불명확하다”고 밝혔다.

1980년대와 90년대 팝의 디바였던 휘트니 휴스턴은 불행한 결혼생활에 이은 마약 중독과 음주로 2000년대 들어 피폐된 삶을 살았고, 최근 지인들에게 단 100달러를 빌려 생활할 정도로 빈곤한 상태임이 알려지는 등 ‘사실상 파산’한 상태여서 팬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팝의 여왕으로 위세를 떨치던 전성기 시절 휴스턴은환상적인 목소리와 파워풀한 성량으로 많은 팬들을 보유했다. ‘I Will Always Love You(아윌 얼웨이즈 러브 유)’ ‘Saving All My Love for You(세이빙 올 마이 러브 포 유)’ 같은 주옥같은 히트곡을 남겼다.

휘트니 휴스턴은 1985년 발표된 데뷔앨범이 전세계적으로 2500만장이 팔리며 팝계의 신데델라가 됐다. 그녀는 총 7장의 앨범과 3장의 영화 사운드 트랙을 발표했으며 6번의 그래미 수상자가 됐다.

그녀가 판매한 앨범과 싱글 수만 해도 전세계적으로 1억 7000만장. 지금까지 30번의 빌보드 어워드 수상과 22번의 어메리칸 뮤직 어워드 수상, 2번의 에미상 수상 기록을 갖고 있다.

그녀는 3번의 영화에 출연해 영화배우로서의 면모도 과시했다. 국내 1996년 개봉된 ‘사랑을 기다리며(Waiting to Exhale)’을 비롯해 특히 영화 ‘보디 가드’의 대 성공으로 영화 배우로서의 능력도 인정 받았다.

그녀가 무너지기 시작한 건 2000년대 들어. ‘힙합계 악동’ 바비 브라운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이다. 브라운의 영향으로 술과 약물에 빠졌고, 폭행당한 모습까지 공개되며 긴 슬럼프를 겪었다.

2004년과 2005년 두 차례 마약 재활 치료를 받으며 재기 가능성도 보였지만 그 이듬해 다시 코카인 흡입 사실이 보도되며 또 한번의 악몽같은 시기를 보냈다. 또 2007년 이혼까지 겹치면서 ‘휴스턴의 시대는 끝났다’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그녀의 10대 딸마저도 마약을 흡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이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음반 제작자 클라이브 데이비스의 도움을 받아 2009년 앨범 ‘아이 룩 투 유(I Look to You)’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며 화려하게 컴백했다. 지난해 5월까지 마약 중독과 싸우며 재활 치료를 반복했지만 결국 48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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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니 휴스턴(왼쪽)과 바비 브라운.

휘트니 휴스턴은 어쩌면 대스타가 될 운명을 타고 났던 것 같다. 가스펠 싱어로 유명세를 날리던 시시 휴스턴의 딸이자, 1960년대 팝 디바였던 디온 워릭의 조카였고, 명가수인 아레사 프랭클린이 그녀의 대모(代母)다.

그녀는 젊은 가수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폭발적인 성량의 팝가수 머라이어 캐리 데뷔 당시 ‘휴스턴의 도플갱어’란 찬사가 돌았고,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역시 창법이나 스타일면에서 휘트니 휴스턴과 많이 닮아있다는 평이다.

태어날 때부터 음악적 DNA를 물려받아 ‘뼛속까지’ 팝 스타였던 그녀가 망가진 건 대체 왜일까. 외신 등 전문가들은 ‘나쁜 남자’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1992년 랩댄스의 대가인 연하의 바비 브라운(43)과 결혼하면서 그녀의 인생은 마약과 술에 쩌들기 시작했다. 바비 브라운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잔인하게 하지 말아요(Don't Be Cruel)’로 팝스타에 오른 인물로, 요즘 20대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셔플 댄스’의 원조격인 ‘토끼춤’의 창시자로 불리고 있다.

그녀가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90년대 중반, 그녀는 코카인과 마리화나 등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팬들이 먼저 알아차렸다. 힘이 넘치고 청아했던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거칠고 쉰 목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바비 브라운과의 불화설도 점차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를 구렁텅이로 빠뜨린 바비 브라운은 대체 누구일까? 그는 팝계 유명 제작자 모리스 스타가 발굴해 만든 ‘뉴 에디션’ 그룹으로 데뷔했다. 모리스 스타는 1980년대 후반 메가톤급 인기를 누리던 ‘뉴키즈온더 블록’을 히트 시킨 제작자로 그의 눈에 띄었다는 것만 해도 바비 브라운의 ‘끼’는 입증된 셈이었다. 하지만 1986년 돌출 행동으로 결국 퇴출됐고, 솔로로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지만 쉽게 인기를 얻진 못했다.

그러다 흑인 음악계를 뒤흔든 베이비 페이스와 1988년 공동으로 음반을 제작하면서 아티스트로 거듭났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토끼춤’을 유행시킨 ‘에브리 리틀 스텝’으로 큰 인기를 올리며 흑인 음악을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1992년 휘트니 휴스턴과 결혼하며 ‘팝스타 커플’로 세간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지만 안정적인 가정 생활을 원하던 휴스턴과는 달리 자유분방한 스타일의 바비 브라운은 결혼 생활을 평탄하게 유지하지 못했다. 1993년 바비 브라운이 마약으로 체포된 것을 기점으로 이들 부부의 롤러코스터 같은 결혼 생활은 자주 타블로이드지를 장식했다.

바람기 다분한 바비 브라운의 잦은 폭행과 폭언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휴스턴은 급기야 마약에도 손댔다. 2000년 1월 휴스턴은 하와이 공황에서 남편과 함께 마리화나 소지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2002년 휴스턴은 미국 ABC방송의 토크쇼 '프라임 타임'에 출연해 "마약과 술을 남용했다"고 처음으로 시인했다. 당시 그녀는 “가장 악마는 바로 나”라며 “나는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나의 최악의 적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이들 부부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2003년엔 부부 싸움 끝에 바비 브라운이 휴스턴을 구타해 경찰에 체포되고 결국 이듬해 바비 브라운은 법정에 출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휴스턴은 또 한번 남편을 용서하기로 했다.

마약 재활 치료를 거듭하던 휘트니 휴스턴은 또 한번 타블로이드지 내셔널 인콰이어러 지에 마약 복용 사진이 실리며 또 한번 구설을 겪었고 결국 2006년 남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청구해, 이듬해 공식적으로 결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