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연료
월동준비 제1호는 연탄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위한 연탄배달이 겨울철 봉사활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연탄파동이란 말이 생길 만큼 연탄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겨울 한파에다 수송문제로 생겨난 1966~1967년,
중동전쟁으로 석유파동이 몰고 온 1973~1974년, 이상한파로 인한 1977년, 이란의 국내 혼란과 이슬람혁명으로 제2차 석유파동이 몰고 온
1978~1980년은 연탄파동이 일어난 때이다.
1966년 10월 연탄파동 때는 서울 시내 동장들이 시청에 몰려가 항의했으며,
“연탄이 귀해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으며, 연탄은 부르는 게 값”이라는 기사가 언론마다 대서특필되었다. 급기야 대통령이 직접 긴급회의를
주관하면서 “장관직을 내놓을 각오로 조속한 시일 안에 필요량의 연탄공급계획을 실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석탄 수송을 원활하게 하려고 산악을
뚫고 태백선?영동선 등의 철도가 생겨났으며,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 연탄 운반 종사자들에게는 야간통행증이 배포되었다. 방송사에서는 공모전 1등
상품으로 연탄을 내놓아 폭발적 반응을 얻기도 했다.
연탄공장에서 연탄이 오는 날은 만사를 제쳐놓고 배달 차량을 기다렸다. ‘연탄
오는 날’은 생일보다 더 강조되었다. 1970년대의 연탄배달 차량은 딸딸이로 불리던 삼륜 화물차가 주류를 이뤘다. 마을 공터에 연탄을 부리면
남자는 지게에 10∼20장을 져 날랐고, 여자는 고무 대야에 대여섯 장씩 이고 날랐다. 어린아이들은 한두 장씩 손에 안고 날랐으며, 조금 큰
아이들은 궤짝에 연탄을 싣고는 밀고 당기면서 날랐다. 남편이 출근하고 없을 때가 잦았으므로 연탄 나르기는 대체로 아내나 아이들의 몫이었다.
1970년대 후반 들어서는 두 장, 세 장을 한꺼번에 들어 올리는 연탄집게가 철물점에 등장했다.
1960~1980년대에는 연탄이 가장
소중한 연료였으니 조심조심 다뤘다. 연탄창고에 연탄을 쌓다가 잘못 쌓으면 한 줄이 왕창 무너지기도 했다. 깨어진 연탄은 마당 앞에 보관하다가
이웃집과 날을 맞춰 연탄 찍는 일꾼을 불렀다. 연탄모형의 틀에 부서진 연탄부스러기를 넣고 나무망치로 때리면서 한 장 한 장씩 찍어 낸 것이다.
일상을 지핀 연탄의 풍경
당시, 오늘날의
주유소보다 더 흔한 것이 연탄가게였다. 연탄공장과 달리 연탄가게는 연탄을 낱장으로 판매했다. 아랫부분을 홀쳐 묶은 새끼줄로 구멍에 꿴 연탄을
가게에서 사서 양손에 들고 다니는 모습은 겨울철의 일상적 풍경이었다.
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광부들이 지하 수백 미터 깊이의
막장에서 캔다. 현재 장성광업소의 광부들은 지하 천 미터에서 채탄하고 있다. 석탄은 산업발전의 에너지원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원동력이며,
연탄은 서민들에게 따뜻한 난방을 제공한 산림보호의 주역이다. “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만 쩍 벌리는 게 뭘까?”라는 수수께끼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산의 나무를 땔감으로 잡아먹고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는 ‘아궁이’를 묻는 이 수수께끼는 연탄사용의 일상화와 함께 사라졌다. 국토의
65%가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산림을 오늘날처럼 잘 가꿀 수 있게 한 것은 오직 연탄 덕분이다.
연탄이 귀하게 쓰이던
1950∼1970년대 탄광촌의 철길에는 낡은 화차에서 떨어지는 탄을 주우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득실거렸다. 철로 주변에서 긁어모은 탄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연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을 찍는 나무 수타기가 등장했는데, ‘배꼽에 낀 탄가루를 모아 연탄을 찍었더니 한겨울을
따뜻하게 보냈다.’라는 유행어가 나온 것도 그 무렵이다.
연탄불을 갈 때는 기술이 필요하다. 밥하는 시간에 맞춰 연탄불의 화력을
조절하는 것이라든가, 새벽에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연탄불을 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낮에는 주로 아이들이 연탄불을 갈았으나 밤중에는
어머니 몫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연탄불 가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화덕을 들여다보느라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연탄과 관련한 금기행위도
있다. ‘남편이 출근하기 전에는 연탄불을 빌려주지 않는다’거나, ‘새댁(주부)이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주부가
연탄불을 꺼트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네 엄마들은 잠을 자다가도 연신 부엌을 들락거려야 했다. 불을 꺼트려 이웃집에 밑불을 얻으러 갈
때는 새 연탄을 한 장 들고 가는 것이 예의였다. 불이 붙은 연탄을 가져오면서 새 연탄을 그 자리에 얹어놓았다.
-
불을 갈다보면 밑에 있던 연탄까지 붙어서 딸려 나오곤 한다. 달라붙은 연탄 두 장을
바닥에 눕혀놓고 가운데를 연탄집게로 쳐서 떼어내는데, 불 붙은 연탄까지 깨트려 낭패를 겪곤 한다. 꺼낸 연탄을 넣을 때는 불이 붙은 아래의
연탄과 위의 새 연탄구멍을 서로 맞춰야 한다. 그런데 화덕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연탄가스에 숨이 막혀 연탄의 어긋난 구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982년에는 고개를 안 돌리고도 연탄구멍을 잘 맞출 수 있도록 한 연탄집게가 발명됐다는 소식이 신문 광고란에 등장했다. 집게 중간쯤에
투명하게 처리한 차단막을 단 연탄집게는 ‘유독가스 및 먼지 흡입 차단 방지기’란 거창한 이름을 걸고 판매되었다.
장기간 외출할 때는
연탄불을 피워달라는 뜻에서 이웃집에 열쇠를 맡겼다. 추운 날 집에 왔을 때 온기도 필요하거니와 더 중요한 것은 연탄가스 중독 예방을 위해서였다.
화덕에 연탄불을 처음 피우면 중독 위험이 더 컸다. 1970년대에는 해마다 수백 명의 사람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어갔다. 날이 추울수록 방문을
꼭꼭 닫아걸었으니 늦가을부터 봄 사이의 뉴스에서는 ‘일가족 연탄가스로 사망’같은 안타까운 기사가 연일 쏟아졌다. 특히 흐린 날이나 비 오는 날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연탄은 연탄가스 외에도 연탄재 처리가 골칫거리였다. 생활쓰레기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1990년대 초 농작물 밭의 토양 개량용, 수질 정화용으로 연탄재가 인기를 끌면서 연탄재를 서로 가져가겠다는 농가가
늘었다. 제 한 몸을 불살라 방구들을 데우고 난 마지막 재마저 활용하는 연탄은 숭고하리만큼 활용도가 높았다.
-
매운 추위를 이기는 힘, 연탄불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석탄이 사양화 길을 걸으면서 석탄은
남아돌았다. 재고탄으로 북한 주민을 돕자는 의견이 국회에서 제기되었고, 2003년 ‘금강산 연탄 보내기’ 사업을 필두로 해마다 연탄을 지원하고
있다. 연탄은 남북화해의 불꽃으로도 기능하고 있다.
이제 연탄은 문화축제 현장에 등장해 한국 근대생활 문화의 필수품이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사북석탄문화제에서는 연탄과 연탄재를 장기알로 사용하여 연탄집게로 옮기는 연탄장기대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연탄역도대회, 연탄
높이 쌓기, 연탄 들고 릴레이 경주, 조개탄 만들기, 미니연탄 만들기, 나무연탄 만들기, 연탄 새끼줄 끼워 들고 달리기, 연탄 빨리 나르기,
연탄 이고 빨리 달리기, 연탄 오래 들기, 왕연탄 빨리 꾸미기, 수타식 연탄 찍기 등이 선보였다.
인기 만화영화 ‘아기공룡 둘리’에
등장해 인기를 끈 연탄 머리 모양의 마이클은 ‘라면은 구공탄에 끓여 먹으면 맛있다.’라고 노래한 바 있다. 드럼통을 개조한 연탄 화덕 위에
음식을 익혀 먹는 일은 연탄을 때던 시절 식당의 전형이다.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복고풍 식당이 성공을 거두는 것은 연탄에 대한 향수를 못
잊어서일 것이다. 연탄은 수능시험 때도 인기를 끈다. 연탄의 뜨거운 화력처럼 시험에서 ‘확 붙어라!’라는 의미를 담은 연탄 모양의 엿, 과자,
액세서리가 출시됐다. 또 정답을 잘 집으라는 의미에서 연탄집게 모양의 제품도 등장했다.
한 장의 연탄에는 수백 미터의 지하
막장에서 흘린 광부의 검은 땀이 녹아있다. 연탄이 자글자글 끓는 동안 아랫목에서 노랗게 눌어붙던 장판, 아랫목에 엎드려 읽던 책, 아랫목의 담요
밑에서 늦게 귀가하는 가족을 기다리던 공깃밥, 손님이 오면 아랫목부터 권하던 인정, 아랫목에 발을 모으고 나누던 정담들은 가난하고 매서운 겨울을
이기는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