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가 역할 모델로 삼고 배워야 할 대상은 바로 독일이다."(스티븐 래트너·前 미 백악관
경제특별보좌관)
"독일은 세계 경제에서 '새로운 중국'이다."(로마노 프로디·前 이탈리아 총리)
이달 13일 오전 11시쯤 기자가 찾아간 함부르크항(港)은 수출 컨테이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함부르크항은 최근 독일의 사상 첫 1조유로 수출 달성으로 전성기를 맞고 있다. 터미널운영업체인 HHLA(Hamburger Hafen &
Logistik AG)의 막스 존스(Johns) 이사는 “지난해 사상 최대 수익을 냈다. 이 추세라면 2025년에는 함부르크항의 컨테이너 처리
물량이 지금보다 3배 정도 늘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오후 함부르크의 쇼핑 거리 ‘겐제마르크트’는 평일인데도 인파로
붐볐다. 신발가게 종업원 안나(Anna·26)는 “세일 기간이 아닌데도 진열대에 새 물건을 채우기 무섭게 팔려나간다”고 했다. 소비에 인색한
독일인들이 지갑을 여는 바람에 지난해 독일의 민간 소비는 1.5% 증가해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독일 최대 상업도시인 프랑크푸르트의
경우, 2004년 20%에 달했던 시내 건물 공실률이 급감해 요즘 빈 사무실이 없다. 오피스 건물 임대료는 연평균 18%씩 상승했고, 시내
곳곳에는건물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소비재’가 아닌 ‘생산재’를 수출하는 ‘기술 수출국’
독일
경제성장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핵심 동력인 수출의 강점은 ‘크기’보다 ‘내용물’에 있다. 경쟁자가 많은 소비재를 팔지 않고 아무나 모방할 수
없는 ‘기술’, 즉 ‘생산재’를 파는 것이다. 독일경제연구소(IFO)의 게르노트 네르브 연구원은 “독일은 높은 기술을 보유한 ‘하이 퀄리티’의
제품을 수출해 견고한 경제성장을 유지한다”며 “이런 독일의 수출력은 훌륭한 인적 자본과 기업의 혁신 투자, 적절한 수준의 임금 등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소비재 대신 생산재
수출
단기 실적에 연연 않는
유한기업 90만개 넘어
굯 회사 BMW가
대표적
367만개 중소기업의 힘
총매출 5% R&D에 투자
美기업 평균의 20배
유럽 전체가
재정 위기로 신음하던 지난해에도 독일 자동차와 기계·제조, 화학·철강 등은 2010년 대비 8.8~14%씩 성장했다. 이런 생산재 수출형 경제
구조는 중국을 포함한 신흥국과 ‘경쟁’이 아닌 ‘협력’ 구도를 만든다. 즉 중국 등이 수출 물량을 늘리거나 수준 높은 물건을 만들려면 독일의
‘고급 기계’들이 많이 필요한 것이다.
울리히 라이펜하우저 독일기계설비협회(VDMA) 회장은 “지난해 중국에 대한 플라스틱·고무
설비 산업 분야 수출이 30.5% 증가한 7억6640만유로를 기록했다. 이는 역대 한 국가에 대한 수출액으로 사상 최대 규모”라고
말했다.
◇‘유한 기업’으로 R&D 장기 투자 활발, 367만개 중소기업의 힘!
독일 기업들이
수준 높은 기술을 보유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유한 기업(GmbH)’ 제도이다. 유한 기업은 소수의 창업자나 임원들이 적은 자본금으로도 세울
수 있다. 주주들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주식회사(AG)와 달리, 단기 실적에 구애받지 않고 장기적으로 연구개발(R&D) 등에 집중할
수 있다. 독일에는 90만개가 넘는 유한 기업이 있는데, 자동차 기업인 ‘BMW’와 명품 여행가방인 ‘리모와’가 해당된다. 독일 정부 역시 유한
기업 설립을 장려한다.
전체 기업 중 99.6%(367만개)를 차지하는 중소기업(Mittelstand)도 독일 경제의 핵심
견인차이다. 이 가운데 세계 시장 점유율 1~3위에 드는 히든 챔피언급만 1350여개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은 “독일 중소기업의
효율성은 세계 2위이며, 이들은 바스프·바이엘·지멘스·다임러 같은 대기업과 연계해 세계 최강의 제조업 경쟁력을 낳고 있다”고 밝혔다. 독일
중소기업의 총매출액 대비 R&D 투자비율은 3.6%로 대기업(3.1%) 보다 높고, 독일 ‘히든 챔피언’들은 총매출의 5%를
R&D에 투자한다. 이는 미국 기업 평균의 20배 수준이다.
◇포퓰리즘 이겨낸 ‘뚝심 리더십’과 협력적 노사
관계
2003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더 높은 성장과 더 많은 일자리를 위해’를 외치며 ▲소득세 감면을 통한 일자리
창출 ▲고용기간 신축 조정 등을 통한 해고 규제 완화 등을 골자로 한 ‘어젠다(Agenda) 2010’ 개혁에 착수했다. 그 결과 2005년
이전까지 최장 36개월이던 실업 급여 지급기간이 12개월로 줄고, 월급여 400유로(약 65만원) 미만인 미니 잡(mini job) 같은 저임금
일자리도 탄생했다. 2010년 당시 730만명이 ‘미니 잡’에 종사했다.
포퓰리즘
극복한 리더십
실업수당 지급 축소 등
슈뢰더, 경제 체질 개혁
국민들 거센 반발로
야당에 정권
내줬지만
후임자 메르켈 총리는
더 강력한 드라이브 걸어
슈뢰더의 개혁 정책은 정치적 반발을 초래해
2005년 야당이던 기독·기사연합(CDU)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정권이 넘어갔다. 하지만 메르켈은 전(前) 정권의 정책을 뒤집지 않고 오히려
더 강력하게 추진했다. “슈뢰더의 복지·노동 시장 개혁이 없었다면 지금의 독일 경제 번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김영찬·한국은행
프랑크푸르트지점장) 중학교 때부터 ‘직업준비학교(중학 과정)→직업학교(고교)→마이스터(대학)’를 통해 체계적으로 기술 교육을 받고 회사와의
계약을 통해 회사(실습)와 학교(이론)의 이중(二重) 교육을 받는 교육제도는 청년 실업률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비책이다. 기업들은 숙련공을
확보하게 돼 이를 반긴다.
독일 공공부문 노조는 지난달까지 10년 동안 임금 인상을 하지 않았다. ‘해고하지 않는 대신
2011년까지 임금 동결’이라는 협정을 10년 전 사측과 맺었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 조호정 박사는 “정부와 기업, 노조 등 경제 주체들
간의 협력과 대화가 독일 경제의 주춧돌”이라고 했다. 2009년 독일 정부가 단축근로제도(Kurzarbeit)를 도입하자, 근로자들이 적극
호응한 게 대표적이다. 이 제도는 경기침체 시 기업은 해고를 하지 않는 대신 한시적으로 근로시간을 줄여 고용을 유지하고, 정부는 기업에 보조금을
줘 삭감된 임금의 60%를 보전해주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