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난 '오란씨' CM송… 처음엔 "노래 힘 없다" 혹평

'대마초 파동'의 여파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않았다. 방송에 나갈 수도, 무대에 설 수도 없었다. 그렇게 막막하던 시절, '세시봉'에서부터 멘토였던 이백천 선생님이 연락을 해왔다. "광고 음악을 한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솔깃했다.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렇게 광고인 인생이 시작됐다. 1976년 여름, '투 코리안스'로 활동했던 김도향씨와 서울오디오를 설립했다. 처음에 만들었던 CM송 하나가 '하늘에서 별을 따다'로 시작하는 '오란씨'다. 당시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노래 '고엽'의 일부를 따서 만들었다. 그러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오란씨를 만든 동아제약 임원회의에서 이 CM송을 들려주자 모두 "이런 곡이라면 요즘 광고계에서 밟혀 죽는다"고 했다. 노래에 힘이 없는 데다 '오란씨'란 제품명이 가사에 잘 나오지도 않는 이유에서였다.

2011121601324_0.jpg
청량음료 오란씨의 종이 광고. 윤형주가 만든 ‘하늘에서 별을 따다’로 시작하는 CM송이 큰 인기를 끌었다. /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제공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계속 고집하자 동석하신 동아제약 강신호 회장이 이유를 물었다. 내가 답했다. "제가 광고계 입문한 지는 얼마 안 되지만 요즘 CM송은 모두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꼭 털이 듬성듬성 난 사나이들이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어느 놈이 빨리 가나 달리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반면 이 CM송은 저기 들길이 있는데, 어떤 예쁜 소녀가 꽃바구니 들고 걸어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사나이들을 볼까요, 이 소녀를 볼까요?"

강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안으로 결정했습니다." 노래는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연극배우 윤석화씨가 불렀다. 새로운 분위기의 CM송에 오란씨는 큰 인기를 얻었다. 판매도 성공적이었다.

오란씨 이후로 CM송 제작 요청이 쏟아졌다. 라라 크래커, 베지밀, 베비라, 현대칼라, 새우깡, 써니 텐 등을 그때 만들었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해태 한마음 껌 CM송을 만들 땐 해태제과 측에서 시제품 20통을 가져다줬다. 이거 씹으면서 작곡하시면 좋은 작품이 나올 거라고. 껌 씹느라 턱이 아픈데, 그 아픈 게 풀리기도 전에 롯데제과에서 껌 50통을 가져왔다. 롯데제과에서도 껌 CM송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때 만든 게 '멕시코 치클처럼 부드럽게 말해요'로 시작하는 롯데 껌 CM송이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란 농심라면 CM송은 50번 거절당하고 51번째 만든 곡이었다. 이 노래 덕인지 라면 업계에서 농심삼양의 매출 순위가 바뀌게 됐다. 그때 능력을 인정받아 농심 CM송의 대부분은 내가 만들게 됐다.

강근식이 부라보콘 CM송을 제작하며 시작된 통기타 문화와 상업주의의 결합이 이때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송창식은 투게더 CM송을 불렀고, 김세환은 아예 CF에 출연해 통기타를 치며 해태 껌 CM송을 불렀다. 나 역시 하루에 많게는 12곡까지 만들었다. 그렇게 쓴 CM송이 1400여 곡이다.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내게 CM송 제작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20초 안팎으로 짧지만 보통 노래처럼 그 안에 기승전결을 담아야 했다. 광고적으로 성공해야 할 뿐 아니라, 시장에서 잘 팔려야 했다. 내가 노래해야 하는 제품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CM송을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마초 파동'의 여파가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왜 하필이면 대마초 사건을 겪은 연예인에게 제작을 의뢰하느냐"는 기업주도 있었다. 게다가 방송윤리위원회는 "이른바 대마 연예인들의 창작활동은 원칙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사업 성격이 기획 쪽인 데다 생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 준 사람들의 노력으로 다행히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