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녀가 바람피운다고 소송하겠다는 유부남

아내가 성관계 거부한다며 이혼한다는 75세 노인

바지 한 벌, 한 끼 밥값 같은 소소한 일상부터 나랏일까지

툭하면 소송 거는 세상 법이 최소한일 때행복지수 높아"


40대 남자가 얼마 전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만나는 여자가 바람을 피우는데, 어떻게 처벌할 수 없나요? 아니면 소송이라도…." 당황한 변호사가 물었다. "만나는 여자라니요? 의뢰인께선 유부남 아닌가요?" 남자가 말했다. "제 아내 말고, 따로 만나는 여자가 바람을 피운다는 겁니다."

뻔뻔한 그의 태도에 변호사는 할 말을 잃었다. "당신이 간통죄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끝내 하지는 못했다. "법으로 처리할 사안이 아니다"고 말하고는 서둘러 그를 돌려보냈다.

한 노인은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와 무턱대고 "이혼해야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내가 성관계를 거부하고, 말도 잘 듣지 않는단 말이요." 변호사가 물었다. "올해 연세가?" "내 나이? 75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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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어 한참 입맛을 다신 변호사가 말했다. "이혼 소송보다는 부인과 터놓고 얘기하고 잘 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막무가내인 그를 설득하느라 변호사는 애를 먹었다.

미국을 '소송(訴訟) 천국'이라고 하지만 이젠 우리나라도 그에 버금가는 '소송 공화국'이다. 이런 것까지 소송을 하나 싶은 일들이 법정으로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황당한 소송의 상위 랭킹에 꼽힐 만한 게 미국의 '바지 소송'이다. 워싱턴 행정법원의 판사였던 로이 피어슨이 2005년 자신이 세탁소에 맡긴 바지를 분실했다며 한인(韓人) 세탁소 주인 정진남씨를 상대로 5400만달러의 손해배상 소송을 낸 사건이었다.

2008년 연수 차 미국에 있을 때 워싱턴 D.C. 항소법원에서 열린 그 사건의 항소심 재판을 본 적이 있다. 재판의 쟁점은 세탁소에 걸려 있던 '(고객) 만족 보장'이란 문구였다. 피어슨은 "그 문구를 걸어놓고도 서비스를 제대로 못했다"며 거액의 배상을 요구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주장, 그걸 진지하게 듣고 있는 판사 3명, 법정은 마치 블랙코미디의 한 장면 같았다.

그 소송과는 격(格)이 다르지만, 우리나라에도 '한국판 바지 소송'이 있었다. 2006년 정모씨는 세탁소에 흰색 골프바지의 길이를 줄여달라고 맡겼고, 세탁소 주인은 잘라낼 부분을 검은색 펜으로 표시하고 바지를 수선했다. 그런데 정씨가 바지를 빨 때 바지에 남아 있던 검은색 잉크가 번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정씨는 "바지값 29만원을 물어내라"는 소송을 냈고, 세탁소 주인이 25만원을 주기로 하면서 소송이 취하됐다.

하지만 소송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중에 실제 바지값이 22만원이었다는 걸 알고 마음이 상한 세탁소 주인은 "더 많은 돈을 줬으니 버린 바지라도 달라"며 소송을 냈고, 법원은 "버린 바지의 재산상 가치는 0원"이라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지난해엔 '밥값 소송'도 있었다. 한 60대 남자가 서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식당의 밥값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는 일반인의 식권값(5000원)이 법원 직원보다 2배 비싼 것을 알고는 "부당한 차별로 지불한 식권값 5000원과 위자료 1만원을 물어내라"는 소송을 냈다. 지난해 10월 법원은 "법원 직원들은 장기적으로 식당을 이용하지만 민원인은 일시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가격 차별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미국의 바지 소송에 비하면 우리의 바지 소송이나 밥값 소송은 훨씬 상식에 가까운 것이다. 소송을 낼 만한 근거가 있고, 요구한 배상 금액도 합리적이다. 문제는 적정한 선에서 마무리 짓고 화해할 일도 재판으로 끝장을 보는 문화가 우리에게도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소소한 일상부터 나랏일까지 모두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법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탓도 있겠지만, 웬만하면 3심까지 끌고 가다 보니 대법관들도 연간 1인당 3700건(2010년 기준)의 사건을 처리하느라 진땀을 뺀다. 권리 위에서 잠자지 않는 법 의식이 높아진 건 좋은데, 이제는 '법의 남용'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3년7개월을 끈 미국의 바지 소송에서 패소한 피어슨 판사는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했고, 승소한 세탁소 주인 정씨도 소송 부담 때문에 세탁소 문을 닫았다. 항소심 판결 직후 정씨는 "모두 패한 것이다. 이런 소모적인 소송이 다시 벌어져선 안 된다"고 말했다. 법으로 모든 걸 재단하려면 사회가 피곤해지고 소모적이 된다는 절절한 호소였다.

이미 발생한 손해를 소송으로 완전히 회복하는 건 불가능하다. 소송은 손해를 줄이기 위한 다툼일 뿐이다. 한 법조인은 "적정한 선에서 한발 물러설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다. 소송이 능사(能事)가 아니며, 법이 최소한일 때 사회의 행복지수가 높아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