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충격에 강한 스위스
매출액 10대 기업 가운데 8개가 지방도시에 입지
실업률 3.4%… 거의 완전고용, 국민들 높은 구매력
유지
제조업 대출 위주 금융 발달… 유럽 부실채권 투자 적어
스위스 취리히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슈비츠(Schwyz) 주(州)의 작은 마을 이바흐(Ibach). 단층의
단독주택과 4~5층 공동주택이 섞여 있는 인구 3500명의 소도시다. 입구로 들어서자 붉은색 바탕에 흰색 십자가가 선명한 간판이 보였다. 일명
'맥가이버 칼'로 유명한 빅토리녹스(Victorinox) 본사 건물이다.
세라믹으로 칼날을 연마하던 보흐만(51)씨는 "우리
동네에서 만든 칼이 세계 최고"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곳 이바흐에서 태어난 그는 빅토리녹스에서 33년째 일하고 있다. 그의 삼촌도 이곳에서
일하다 퇴직했다고 했다.
현재 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1000여명. 이 가운데 70% 정도가 슈비츠 주 출신이다. 보흐만씨도
인근 루체른에서 기술학교를 졸업한 후 이곳에 입사했다.
- ▲ 스위스의 소도시 이바흐에 있는 빅토리녹스 본사 공장에서 직원들이 ‘맥가이버 칼’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128년째 본사를 옮기지 않고 지역민들을 고용하는 이 회사처럼, 스위스의 세계적인 수출 제조업체들은 지방 본사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며 나라 경제에
기여한다.
빅토리녹스가 이바흐에 자리잡은 것은 128년 전이다. 1884년 창립한
이후 줄곧 이 마을에 본사를 두고 있다. 홍보 책임자인 우스 위스(Wyss)는 "여기서도 얼마든지 필요한 우수 인력을 육성할 수 있어 굳이
취리히 같은 대도시나 해외로 본사를 옮길 이유가 없다"면서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지역사회와 공생하는 것이야말로 기업의 큰 자산이자 의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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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제조업체가 경쟁력의 핵심2011년 실업률 3.4%, GDP 대비 재정수지 0.8% 흑자,
GDP(국내총생산) 증가율 2.1%(IMF·OECD 통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발 재정위기 속에서 스위스가 낸 성적표다. 유럽 전체가
실업(失業)의 늪에 허우적대지만, 스위스는 완전 고용에 가깝다. 스위스 경제는 지난 15년 동안 2003년(-0.2%)과
2009년(-1.9%)을 제외하고 꾸준히 2~3% 내외의 플러스 성장세를 기록해왔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스위스의 경제지표를 두고
"이웃 나라들에는 꿈 같은 이야기"라고 표현했다. 가히 글로벌 경제위기의 안전지대라 불릴 만하다. 실제로 지난해 유럽 재정위기가 발생한 직후
스위스 통화인 스위스프랑(CHF)은 안전자산으로 인식되면서 가치가 급등했다. 스위스는 1유로를 1.2스위스프랑으로 유지하는 사실상의 고정환율제를
도입해야 할 정도였다.
스위스 경쟁력의 비결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각 지역에 양질의 일자리를 공급하는 세계적 제조업체들의 역할이
크다는 분석이다.
세계 최대의 식품회사인 네슬레의 스위스 본사는 레만호 인근 브베(Vevey)에 있다. 스위스의 대표적인 시계브랜드
론진도 1832년 중소도시 생티미에(Saint-Imier)에 설립된 후 본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스위스에서 2010년 기준 매출액 상위
10대 기업 중 수도
베른이나 상업중심지 취리히에 있는 곳은 단 2곳뿐이었다.
이 같은 제조업체 덕분에 스위스 경제는 낮은 실업률을 유지하고, 국민은 높은
구매력을 유지한다. 스위스도 한국처럼 수출 비중이 높아 글로벌 경제위기에 취약하다. 하지만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춘 제조업체들이 글로벌 시장에
수출을 지속하면서 나라 경제를 지탱하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높은 임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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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과
상생하는 금융산업스위스 제조업체의 경쟁력은 시계와 제약, 화학 등 기존에 알려진 산업들에만 국한되지 않고, IT 등
신산업에서도 나타난다. 유료 케이블TV 관련 소프트웨어 업체인 나그라비전(Nagra Vision)은 로잔에서 기차로 약 30분 떨어진 소도시
시조(Scheseaux)에 있다. 회사 입구에 들어서자 최신 3D(입체영상) 스마트 TV가 수십대 놓여 있었다. 다니엘 헤레라(Herrera)
부사장이 리모컨을 누르자 자신의 손에 있던 태블릿 PC에 저장된 영화 파일이 TV에 곧바로 나타났다. 소비자가 보유한 모든 통신·영상 장비를
무선으로 연결하는 소프트웨어를 시연했다. 나그라비전은 스포츠·영화 등 유료 채널을 케이블 TV에 공급하는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세계 점유율
1위다. 헤레라 부사장은 "스위스에 애플이나 삼성 같은 대형 IT 업체는 없어도, 강소 IT기업들이 각각 자신의 분야에서 일등 기업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스위스가 유럽발 재정위기의 와중에도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가는 비결은 정밀한 기술력이 뒷받침된 제조업으로
수출경쟁력을 갖춘 데다, 금융산업이 스위스의 제조업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산업이 스위스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7%에 달한다. 만약
프랑스의 대형 시중은행들처럼 줄줄이 신용등급을 강등당하면 국가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최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스위스은행연합회의 외신기자간담회에서도 관심은 스위스 은행들이 유럽 재정위기의 타격을 얼마나
받을 것이냐에 모아졌다. 스위스은행연합회의 자콥 샤드(Schaad) 국제금융시장담당 이사는 "유럽의 부실 채권을 대량 구매한 스위스 은행은 별로
없다"며 "재정 위기의 타격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상당수 은행은 스위스 제조업에 대출과 투자를 한다"며 "스위스 제조업과
금융업이 위기 상황에서 서로를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탄탄한 제조업과 금융산업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스위스 경제를
떠받치고, 재정도 흑자 기조를 이어가는 덕분에 스위스 경제가 유럽 재정위기의 화약고에서도 '안전 운전'을 해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