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샤넬은 고급 + 실용
이듬해인 1913년 가브리엘 샤넬은 여성용 스포츠웨어를 만들어 의류에도 도전했으며, 이는 패션 역사에 파란을 몰고 왔다. 가브리엘의 디자인은 고급스러우면서도 심플하고 실용적이었다. 특히 그녀가 1차 세계대전 중 속옷에 사용되던 저지 원단을 사용해 만든 디자인은 그 실용적인 면에 큰 점수를 받아 프랑스 전역에 알려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1920년대에 불어온 모던의 바람은 패션에도 영향을 미쳤고, 가브리엘은 비즈 장식 드레스와 리틀 블랙 드레스(LBD), 그리고 투 피스 혹은 쓰리 피스로 이뤄진 수트 등을 발표해 모던 패션의 기틀을 잡았다. 그녀의 드레스는 수트는 코르셋으로 몸을 옥죄던 여성들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켰고, 여성을 사회적인 위치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1921년, 코코 샤넬은 패션이 아닌 새로운 영역에 손을 뻗엇다. 이번에는 향수였다. 지금까지도 명실상부 ‘최고의 향수’라고 일컬어지는 ‘샤넬 넘버 5’가 그것이다. 코코가 엘레강스함에 주안점을 두고 만들었다고 밝힌 이 향수는 5월 5일에 발표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넘버 5(No.5)’라는 이름이 붙었다.
모더니즘의 한가운데 서서
그러던 1939년, 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해 가브리엘 샤넬과 그녀의 브랜드는 한 차례 위기를 맞았다. 프랑스가 점령당한 후 가브리엘의 부티크는 문을 닿아야 했고, 그녀는 스위스로 몸을 피했다가 1953년 프랑스가 자유를 찾고서야 파리로 돌아왔다.
가브리엘이 오래 문을 닫은 동안 패션계에는 크리스찬 디올의 ‘뉴 룩(New Look)’이라는 복병이 등장해 원래의 입지를 되찾기는 쉽지 않았다. 코코는 보석상 로버트 구센스와 손을 잡고 샤넬 주얼리 라인을 만들어 타 브랜드와의 차별화를 진행시켰다. 그 중 한 가지가 기존에 있던 샤넬 수트에 진주와 흑진주 등 보석을 달아 새로운 버전으로 발표한 것이었다.
그리고 1955년 2월, 코코 샤넬은 또 하나의 히트작을 만들어냈다. 골드 체인 스트랩이 달리고, 몸체에는 퀼팅 장식을 넣은 백으로, 샤넬의 베스트 셀러 ‘2.55백’이 그것이었다. 가브리엘은 여성들이 손에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던 코코는 어깨에 멜 수 있도록 숄더 스트랩을 달았고, 이것은 최초의 숄더백이었다.
코코 샤넬, 그 이후
눈을 감는 날까지 디자인을 계속했던 ‘거장’ 가브리엘 샤넬은 패션계 전반에 크게 영향을 끼쳤고, 1978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녀의 빈 자리는 이본 두엘, 장 카자봉, 필립 기부르그가 이어받았지만 코코의 컸던 존재감을 메우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던 샤넬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은 것은 신인 디자이너 칼 라거펠드였다. 1983년 샤넬의 치프 디자이너로 부임한 그는 ‘코코 샤넬이 무덤에서 일어났다’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클래식한 무드를 고수하면서 새 트렌드를 접목시킨 첫 컬렉션을 발표했다.
이후 칼 라거펠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샤넬 패션 라인을 이끌며 클래식과 트렌드의 공존을 보여주었고, 샤넬이 럭셔리 브랜드 중에서도 톱 클래스에 자리잡는 데에 일조했다. 브랜드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패션 라인의 성공은 액세서리 및 향수, 코스메틱 사업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현재 샤넬은 사업을 확장해 전세계에 310여 개의 매장을 운영하면서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샤넬의 뮤즈들
베라 바테 롬바르디
1925년 가브리엘 샤넬(사진 왼쪽)의 뮤즈가 된 베라 바테 롬바르디(사진 오른쪽)는 캠브리지 후작의 사생아였다. 롬바르디의 개인적인 스타일이 곧 브랜드 샤넬의 스타일이었다. 사교계에 발이 넓었던 롬바르디는 샤넬을 사교계에 소개했고, 초기 샤넬이 알려지는 데 공을 세웠다.
이네스 드 라 프레상주
모델 출신 디자이너인 이네스 드 라 프레상주는 프랑스의 패션 아이콘이다. 그녀는 칼 라거펠드가 직접 발탁한 뮤즈였고, 또한 브랜드 샤넬과 독점 계약한 최초의 모델이었다.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샤넬 뮤즈로 활동한 그녀는 샤넬 광고를 직은 이후 유명해졌고, 마리안느(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혁명정신과 프랑스공화국을 상징하는 여성상) 모델로 발탁되면서 칼과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칼 라거펠드는 “기념비에 드레스를 입히고 싶지 않다. 천박하다”라고 했고, 이에 이네스는 마리안느 촬영을 감행하고 샤넬과는 계약은 파기됐다. 최근에 이네스와 칼의 관계가 회복돼 이네스는 2011년 다시 샤넬 컬렉션 런웨이에 섰다. 이네스 드 라 프레상주는 1989년 칼 라거펠드와, 그리고 샤넬과 결별한 후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로저 비비에르에 몸을 담고 있으며 로레알 파리의 광고 모델이기도 하다.
바네사 빠라디
프랑스의 가수겸 영화배우인 바네사 빠라디는 1991년 향수 코코 모델로 시작해 향수 및 코코 코쿤, 코코 루즈, 화장품 등 샤넬의 다양한 품목에 대표 얼굴로 표현된다. 바네사는 1985년 가수로 데뷔해 1989년부터 영화에도 출연하는 등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나 샤넬 뮤즈로서의 활동이다. 매혹적이면서도 신비한 그녀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팬이 많다. 바네사는 세계적인 영화배우 조니 뎁과의 사이에 아들딸을 낳았다.
안나 무글라리스
프랑스 배우 안나 무글라리스는 2002년부터 향수 얼루어(Allure)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도 얼루어 모델로 탄탄한 입지를 지키고 잇는 그녀는. 칼 라거펠드가 직접 발탁한 뮤즈 중 한 명이다. 그 덕분에 안나는 2009년작 ‘코코 샤넬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에서 코코 샤넬 연기했고, 이 작품으로 62회 칸 영화제에까지 진출했다.
니콜 키드먼
새하얀 피부에 금발 헤어가 매혹적인 니콜 키드먼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샤넬 넘버 5 모델을 맡았다. 니콜 키드먼은 단지 지면 광고만 촬영한 게 아니라 3분 짜리 CF까지 촬영했다. 그 광고의 감독은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 '뮬랑루즈' 감독 바즈 루어만이었다. 이 3분 짜리 광고로 니콜 키드먼은 1분에 가장 많이 광고료를 받은 배우로 기네스북에 기록됐다. 이 한 편에 무려 371만 달러(약 40억 원)를 받았고 하니 그녀의 인기나 몸값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니콜 키드먼의 샤넬 넘버 5 모델 자리의 바통은 오드리 토투에게 넘겨졌고, 니콜 키드먼은 현재 고급 시계 브랜드 오메가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키이라 나이틀리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는 2006년부터 코코 마드모아젤 광고를 맡고 있다. 날카로우면서도 분위기 넘치는 그녀의 분위기는 여느 모델 못지 않게 샤넬 향수의 엘레강스함을 끌어낸다. 키이라는 스스로도 샤넬 옷을 굉장히 즐겨 입는 샤넬 매니아다.
오드리 토투
오드리 토투는 영화 ‘코코 샤넬(Coco Before Chanel)’에서 샤넬 창립자 코코 샤넬을 연기했다. 이 인연으로 니콜 키드먼의 자리를 차지하고 2008년 샤넬 넘버 5 광고 모델이 됐다. 영화 '코코 샤넬'의 감독 안느 퐁텐은 칼 라거펠드에게 영화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코스튬 스케치를 감수 받으며 오드리 토투의 사진을 보여줬다. 돌아온 칼의 답변은 ‘진정한 샤넬이다!’
릴리 알렌
릴리 알렌은이미 오래 전부터 샤넬 매니아로 유명했다. 샤넬백은 기본이오, 그녀의 옷장에는 샤넬 옷과 액세서리까지 넘쳐날 기세다. 유명한 세계적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샤넬 프론트 로에 앉을 정도로 칼 라거펠드와도 친분이 깊다. 그런 그녀가 2009년 코코 코쿤백 모델로 발탁됐을 때 그녀의 팬들과 샤넬 매니아들은 '샤넬 매니아의 승리'라 일컬었다. 릴리 알렌은 칼 라거펠드와도 돈독한 우정을 자랑하는데 최근 있었던 결혼식에는 칼이 직접 디자인한 웨딩드레스 입어 화제였다. 2009년 코코 코쿤백 촬영 역시 칼 라거펠드가 직접 찍었다. 코코 코쿤백은 투웨이로 사용가능한 가방인 만큼 젊고 혁신적인 이미지가 필요했다는 후문이다.
블레이크 라이블리
현재 마드모아젤 핸드백 라인의 공식 얼굴이다. 영화보다는 미국 드라마 '가십걸'로 패션 아이콘이 된 그녀는 현재 또래 중 누구보다도 핫하다. 자연스러움, 신선함과 젊은 이미지에 매력을 느낀 샤넬은 그녀를 새 뮤즈로 발탁했고, 2011년 3월부터 공개된 마드모아젤 라인 광고는 칼 라거펠드가 직접 사진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