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대는 BB(Before Obama :오바마 이전)와 AB(After Obama:오바마 이후)시대로 구분될 것이다.” 흑인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의 말이다.
미국의 건국과 함께 백인들이 평등을 기치로 구축한 정치 피라미드의 최고정점은 항상 백인들의 차지였다.
흑인유권자의 비율이 13%에 불과한 미국에서 흑인이 이 피라미드의 정점에 올라선다는 것은 요원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침내 미국 정치권력의 최고정점에 흑인이 올라섰다.
미국땅에 노예로 끌려와 멸시와 천대를 받아온 흑인이, 뿌리깊은 인종갈등의 역사로 점철된 미국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단순히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로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한다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획기적 사건이다.
미국 사회가 겉으로는 나이와 성별, 직업,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을 표방해왔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백인과 흑인은 공공화장실도 같은 사용할 수 없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남부 일대를 강타했을 때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흑인 저소득층이었다. 지금도 주요 대도시 도심의 흑인 거주지역은 범죄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있다.
이런 미국 사회에서 흑인 대통령의 탄생이라는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미국에만 국한되는 혁명이 아니다.
세계 유일 초강대국 지위를 유지해온 미국에서 유색인종이 최고권력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전세계에도 대단한 상징적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인종과 성(性), 계급, 종교, 이념, 빈부의 격차에 따른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를 통해 그간의 갈등의 상처를 치유하며 인류가 화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흑인 대통령 출현은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미국의 우방뿐만 아니라 중동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오바마의 열풍이 불면서 지구촌 곳곳에 버락 오바마의 당선을 간절히 바라는 여론이 고조된 것은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니다.
이는 그간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보여준 일방주의 외교노선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거니와, 백인 우월주의가 내재된 서구중심의 글로벌 정치·경제 역학구도에 대한 거부감이 표현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바마의 당선으로 이런 변화의 요구가 당장 실현될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미국의 외교노선과 앵글로색슨의 후예들이 장악한 서구중심의 글로벌 정치·경제 질서가 일거에 변모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무리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가 흑인 오바마 대통령의 출현으로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 것만은 분명하며, 변화를 위한 첫걸음이 내디뎌진 것에 대해 지구촌 주민들은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1776년 건국된 미국에서 초대 조지 워싱턴에서부터 현 조지 부시 대통령까지 42명의 대통령이 등장하는 동안 백악관의 문을 두드린 흑인지도자들은 오바마까지 포함해 모두 7명이다.
최초의 백악관 도전에 나섰던 흑인은 셜리 치섬 전 연방하원의원으로 여성이었다. 1972년 민주당내 예비선거에 출마했지만 흑인 첫 대권주자라는 기록만 남겼을 뿐 득표율은 미미했다.
두번째 도전자는 84년과 88년 민주당 경선에 뛰어든 제시 잭슨 목사로 미시시피에서 45%의 지지율을 얻기도 했다.
이후 무소속의 레노라 풀라니, 공화당의 앨런 키스, 민주당의 캐럴 모슬리, 앨 샤프턴 목사 등도 대권을 꿈꿨으나 이렇다할 반향을 얻지 못하고 꿈을 접었다.
과거 흑인 정치지도자들의 대부분이 억압받는 소수인종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대의에 집착, 유색인종의 피해의식을 정치에너지로 삼는 한계를 보였던 것과 달리 오바마는 흑백간 갈등뿐만 아니라 연령과 성별, 종교, 빈부, 보수·진보 등 모든 대립과 갈등을 치유하고 통합을 이뤄내겠다는 것을 기치로 내걸어 계층 구분없이 고른 지지를 얻어 대권도전에 승리한 것이 차이점이다.
이는 뒤집어 보면 백인사회가 인정할 수 있는 ‘위험스럽지 않고 온순한 흑인’의 이미지를 심는데 오바마가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이번 대선레이스에서 공화당의 존 매케인이 60년대 미국내 자생적 테러리스트와 과격성향의 목사 등을 오바마와 연계시켜 오바마를 위험스런 존재로 부각시키려 무진 애를 썼지만, 오바마는 이런 올가미를 빠져나갔다.
미국내 흑인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오바마는 미국땅에 노예로 끌려와 핍박과 억압을 받아온 대부분의 흑인과는 이질적인 존재다. 오바마는 서구에 유학한 케냐의 엘리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미국내 흑인들과 정체성 공유하기에는 모자람이 있지만 오바마는 이런 한계마저 극복, 변화의 메시지로 흑인뿐만 아니라 히스패닉 등 여타 소수인종의 표심을 얻는데도 성공했다.
최초의 흑인 미국 대통령 오바마에게서 지구촌 주민들은 힘을 우위를 내세운 강대국 미국이 아니라 ‘친절한 미국’을 기대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라크 전쟁은 현명하지 못한 전쟁이었다. 그래서 철군하려 한다”는 오바마의 목소리는 지구촌 주민들에게 강한 호소력으로 다가왔으며 불량국가 지도자들과도 대화하겠다는 태도는 전쟁이 아니라 대화로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변화된 미국의 리더십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차기 대통령 오바마가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받은 인기에 상응하는 리더십을 발휘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차기 미국 대통령이 헤쳐나가야 할 과제와 도전이 유례없이 무겁고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바마가 흑인 등 비주류와 서민층의 대변자 만은 아니고 미국 대통령은 민주와 공화로 나누어진 지배 엘리트의 나눠먹기식 정치의 산물이라는 지적에도 일리가 없지 않다.
아울러 ‘백인 대통령들’이 해결하지 못한 것을 흑인 대통령이 들어섰다고 해서 일거에 해결되거나 단기간에 근본적 개선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미국의 정치사는 물론 국제 사회에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