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Zapatero) 스페인 총리는 15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릴 G20정상회담 때문에 수모를 당했다. G20회의는 알려진 대로 세계 금융위기 대응책과 새로운 국제 금융질서를 논의하는 자리다. 회의 주최측은 미국. 백악관은 지난달 22일 G20정상회담에 선진7개국(G7)과 신흥 12개국 등 모두 20개국을 초청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스페인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백악관 발표 뒤 스페인은 발칵 뒤집혔다. 스페인은 세계 9위의 경제 규모이고, 구매력 기준으로 보면 G7회원국인 캐나다보다 크다. 국제 투자 시장에서 7번째 큰손이기도 하다. 최근의 금융위기 속에서도 금융권을 잘 관리했다고 국제 언론으로부터 박수를 받은 바도 있다. G20회의에 가면 할 말이 있는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G7도 아니고, '신흥경제국'도 아니어서 제외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스페인 야당 등 많은 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총리의 정책 실패 및 외교력 부재라고 공격했다. 현 사회당 정부는 2004년 3월 집권 뒤 조지 부시(Bush) 대통령의 거듭된 재고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주둔 스페인 군을 빼버렸다. 사파테로 총리는 "이라크전쟁은 재앙이었으며, 이라크점령은 더 큰 재앙을 낳고 있다"고 부시 대통령을 향해 말 폭탄까지 날렸다. 이후 두 사람 사이는 회복될 수 없이 악화됐다.
부시 대통령이 묵은 감정 때문에 초청장을 보내지 않은 걸 사파테로 총리가 그냥 넘기고 말았으면 그걸로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초대권을 얻어내기 위해 딱할 정도로 매달렸다. 세계 경제 질서를 다시 쓰는 자리에 빠질 수 없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사파테로 총리는 10월 24일 중국 베이징의 아시아유럽정상회담(ASEM)장으로 날아갔다. 그는 당초 이 모임에 불참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황이 다급해지자 회의 개최 하루 전날 참석한다고 주최측에 통보하고 간 것이다. 그는 중국과 인도, 인도네시아 정상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다. 며칠 뒤인 30일에는 적도를 넘어 남미의 엘살바도르로 갔다.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에 참석, G20회의 초청장을 받아둔 멕시코, 브라질 지도자에게 지원 사격을 당부했다.
그래도 미국은 요지부동이었다. 토니 프래토 백악관 부대변인은 "참석자가 너무 많으면 합의 도출이 어렵다"고 했고,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이 G20 참석국을 골랐는데, (빠진) 일부 국가가 감정을 상한 건 불가피하다"고 차갑게 말했다.
반면, 스페인 경제규모의 3분의 1인 폴란드는 워싱턴 회의 참석을 위해 부시 행정부와 직접 접촉하는 여유를 보였다. 폴란드는 부시가 시작한 이라크 침공에 2500명의 병력을 지원한 바 있다. 자존심을 구기고 2주간 구걸한 끝에 사파테로 총리는 7일 간신히 초대장을 얻었다. 사르코지(Sarkozy) 프랑스 대통령이 부시를 설득, 스페인이 유럽연합 의장국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스페인이 당한 수모는 국제정치의 냉정한 현실을 무시하고 '국익'을 무시한 외교가 자초한 재앙이었다. 초강대국을 조롱하는 결정을 내리는 순간, 사파테로 총리는 이런 후과(後果)를 각오했어야 했다. 총리의 '결단'에 박수를 보냈던 스페인 유권자들도 자신들의 결정이 4년 뒤 결국 어떻게 되돌아오는지를 보았다. 스페인뿐이겠는가? 명분과 국익 사이의 선택은 역시 쉽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