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도산(力道山·1920~1963·사진). 거구의 서양인을 당수(가라테 촙)로 물리친 재일동포 프로레슬러. 1950~60년대 그에 대한 열광은 귀화국인 일본은 물론 모국인 남북한에서도 같은 현상이었다. 하지만 영웅의 이미지는 역도산(한국), 리키도잔(일본), 력도산(북한)이라 불린 이름만큼이나 각기 달랐다.
도시샤대학의 이타가키 류타 교수는 계간 역사비평 여름호에서 '동아시아 기억의 장소로서 역도산'을 분석했다. 그는 역도산(함경남도 신풍리 출생·본명 김신락)이란 동일 인물이 나라마다 각기 달리 보인 것에 '역사적 리얼리티'가 있다면서, 그것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와 인종주의 혹은 민족차별, 냉전 및 포스트 냉전의 동아시아역사'라고 했다.
◆일본 국민영웅 리키도잔
일본에서 그는 전후(戰後) 국민 영웅이었다. 스모 선수에서 프로레슬러로 전향한 후 1953년 일본프로레슬링협회까지 창설했다. 1954년 2월 미국 샤프 형제를 초청해 태그매치를 벌였다. '빨간 머리 파란 눈, 가슴·배에 텁수룩하게 털이 난' 샤프 형제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인을 때려잡은 미국인의 전형'이었다. '미일전쟁'으로 연출된 첫 싸움에서 리키도잔은 당수로 상대를 눕혔다. 그 뒤 그는 '반칙을 일삼는 외국 선수에 맞서 최후에 승리하는 일본 레슬러'로 각인됐다. 조선인 출신이란 사실은 덮였다. 스포츠니폰 신문사 기자였던 데라다 세이지는 "영웅은 일본인이 아니면 안 되는 시대였다. 당시엔 (국적을) 일부러 밝혀내는 것은 본인도 나도 독자도 원치 않았다"고 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레슬러
1960년대 일본 TV 신호가 잡혔던 부산을 중심으로 프로레슬링 붐이 불어닥쳤다. '박치기 왕' 김일도 "일본을 오가는 어부로부터 역도산 얘기를 듣고 내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고 했다. 역도산은 1963년 1월 국빈 대우로 방한했다. 5·16 군사정부 수뇌부가 반겼다. 언론도 '함남 출신 한국인'이라는 프로필과 함께 대서특필했다. 그는 모국의 발전에 공헌하려는 '세계적 한국인 레슬러'로 자리 잡았다.
◆김일성이 '렬사' 칭호도 줘
1959년 북한에서는 '귀국사업'에 따라 재일조선인의 집단이주가 시작되면서 '력도산' 무용담이 퍼졌다. 영화까지 평양에 들어갔다. 김일성은 1963년 7월 "력도산이 미국놈을 쓰러트리는 장면은 몹시 통쾌하다. 앞으로 간부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려고 하니 필름 보관을 잘해야 한다"고 했다. 김일성은 그를 일제·미제에 맞서는 '애국렬사'로 치켜세웠다. 뒤에야 알려졌지만 력도산도 북한에 접근했다. 북한에 남기고 온 혈육과 연락이 닿으며 김일성 50세 생일(1962)에 벤츠를 선물했다. 조선중앙예술단 여성과 동거도 했다. 일본이나 북한에서는 비공개에 부쳐졌다. '대중적 영웅'이 된 것은 1984~85년. '통일신보'는 '그에게도 조국은 있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강제로 일본인으로 호적이 바뀐 것이며 ▲스모 동료의 민족차별 때문에 '왜놈식 상투'를 잘랐고 ▲'원쑤의 땅' 미국으로 건너가 가라테 촙으로 적을 무찔렀다고 소개했다. 북한은 력도산의 죽음에 대해서도 친북행동에 당황한 '미일 반동' 폭력단이 가세했다는 음모론을 폈다. 1991년 북일수교회담이 시작되자 북한은 '일제의 희생자 력도산'을 다시 부각시켰다. 1995년부터 그의 전기와 만화, 영화, 기념우표, 조각상, 얼굴 사진이 붙은 '력도산 술'까지 나왔다.
역도산의 이미지 '변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05년을 전후해 한·일은 영화 '역도산'(설경구 주연)을, 북한·중국은 영화 '력도산의 비밀'을 각각 공동제작했다. 이타가키 교수는 이런 '기억의 복수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동아시아의 불협화 현실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