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붉은 군대와 히틀러 나치군이 벌인 사상 최대의 전투, 기밀자료 등으로 복원

세계사 최대의 전투

가히 '사상 최대 혈투'라 할 만하다. 현대사에서 잔혹하기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악한'들의 대결이었으니. 히틀러(1889~1945)와 스탈린(1879~1953), 20세기 전체주의의 광풍을 몰고 온 '나치즘'과 '소비에티즘'의 주역이 격돌한 싸움이다. 이름하여 모스크바 전투(Battle of Moscow). '홀로코스트'와 '피의 대숙청'으로 기억되는 이 둘이 벌인 203일간의 공방은 숱한 기록을 낳았다.

1941년 9월 30일부터 이듬해 4월 20일까지 전황은 히틀러의 초반 우세, 스탈린의 역전 신승(辛勝)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참혹한 승부였고 처참한 승리였다.

대가는 병사와 국민들이 치러야 했다. 약 700만명의 장병이 동원됐고 약 250만명이 숨졌다. 러시아 역사가들은 약 2700만명의 소련 국민이 희생됐다고 추정한다. 인류 역사상 단일 전투로는 최대 사망자 기록이다.

전사자 수로 보면 소련군(189만6500명)이 독일군(61만5000명)의 3배나 됐다. 하지만 독일에 더 치명적이었다. 불패신화를 자랑하던 전격전(블리츠크리그·Blitzkrieg)에 제동이 걸린 첫 패배, 히틀러는 이때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서로를 끝없이 의식했다. 둘 사이에는 경탄과 증오가 교차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나치 돌격대 내부의 정적들을 제거한 일을 전해듣고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 정적들을 다루는 방법을 제대로 보여준 것이야"라고 감탄했다. 히틀러 역시 스탈린의 숙청 정치에 감명받아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 러시아를 제압하고 난 뒤 스탈린이 계속 나라를 다스리게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야. (…) 스탈린이야말로 러시아인들을 다루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히틀러는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의 정치 지도그룹인 볼셰비키를 증오했다. 스탈린은 1939년 8월 23일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 준비 과정에서 샴페인 잔을 들고 "총통 히틀러의 건강을 기원하며 건배합시다"라고 했지만 조약에 서명할 때는 "물론 독일의 궁극적인 목표가 우리를 공격하는 것임을 잊지 않고 있지"라고 측근에게 읊조렸다.

둘은 밀착과 이반을 반복했다.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을 때만 해도 찰떡궁합이었다. 독일은 9월 1일 폴란드 서쪽을 공격했고 소련은 16일 뒤 동쪽에서 치고 들어갔다. 폴란드는 둘로 찢겨 나갔다. 그해 9월 29일 양국은 사이좋게 우호국경조약까지 맺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러시아까지 겨냥했다. "일단 우리가 문을 걷어차기만 하면 이미 썩을 대로 썩은 러시아 체제는 폭삭 무너질 것이다." 그는 전쟁이 4개월 안에 끝날 거라고 봤다. 공격 개시일을 1941년 5월 15일로 잡은 것은 나폴레옹의 패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폴레옹은 1812년 6월 말 프랑스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정벌에 나섰다가 겨울 혹한을 만나 패했다. 하지만 오만이 화를 불렀다. 발칸 반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러시아 침공 작전을 4주 연기한 것. 히틀러도 나폴레옹과 똑같이 6월에야 군대를 발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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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왼쪽), 히틀러.
스탈린도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렀다. 히틀러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숱한 보고와 징후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 영국의 이간질이라고 봤다. 정작 전쟁이 터지자 소련의 붉은 군대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총기도 병사 10명당 1정꼴이었다.

모스크바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거둔 첫 승리였지만 가장 처참한 승리였다. 그 뒤 소련에서는 승전의 공을 스탈린의 리더십으로 돌렸지만, 저자는 스탈린의 숙청 정책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폴란드계 미국인으로 오랫동안 모스크바와 동구에서 기자 생활을 한 저자는 소련의 기밀 해제 문서들과 참전 용사를 비롯한 56명의 심층 인터뷰, 핵심 인물들의 일기, 편지, 회고록 등을 토대로 전쟁의 심층을 복원해 냈다. 2007년 출간된 후 워싱턴포스트와 LA타임스가 그해 최고 논픽션으로 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