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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김일성의 장남으로 1941년 구(舊)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태어났다. 김정일의 실제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그간 이견이 있었다. 북한은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1974년부터 주민들에게 그의 출생연도를 1941년으로 알렸다가 1982년 김일성의 70회 생일 때부터 1942년으로 선전했다.

김정일은 삼석인민학교, 평양제4인민학교, 평양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 1959년에는 구(舊)동독항공군관학교를 유학했다. 1964년 김일성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의 뒤를 이어 북한의 차기 최고 권력자로 자리 잡은 시기는 1973~1974년이다. 이때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중앙위 비서겸 조직지도부장, 조선노동당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됐다.

이때 김정일은 삼촌인 김평일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부자 세습의 독재 권력을 이어갔다. 이후 김정일은 북한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김정일은 명실공히 북한 1인자로 올라섰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을 유지했다.

김정일이 1인자로 군림한 이후 1995년부터 북한은 유례없는 기근으로 수백만명의 아사자를 냈다. 이 시기를 북한은 '고난의 행군'으로 부른다. 또한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김정일은 수십만명을 수용한 정치범 수용소를 유지했다. 먹거리를 찾고자 중국을 떠도는 탈북자를 북한으로 데려와 구타, 고문을 일삼아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다.

외부의 경제적 제재와 내부의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김정일은 수시로 도발과 외교전을 병행했다. 김정일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2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한편 1999년 연평해전, 2002년 2차 연평해전, 작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을 일으켰다. 국제적으로는 두 번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을 일으켜 UN의 제재를 받았다.

김정일은 이를 해소하고자 올해 중국, 러시아 등을 잇달아 방문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평이 나왔다.

김정일은 작년 아들 중에 3남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목해 대외적으로 알렸으나, 후계 구도는 아직 정착되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2011년 12월 17일 오전8시 30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