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인생에서 모두에게 인정받았음을 깨닫는 때가 두 번 있다. 첫 번째는 걸음마를 배운 순간이고, 두 번째는 독서를 배운 순간이다." - 페렐로프 피츠제럴드
** 본 내용은 그녀생각(고영성)의 신작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만독(느리게 읽다)편'에 있는 내용입니다.
아이는 부모를 통해 읽는다
나는 아이가 잠들기 전에 품에 안고 『피터 팬』을 읽어 주곤 했다. 아이는 동화책보다는 공룡을 더 사랑했지만, 『피터 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에는 관심을 꽤 보였다. 그런데 부모가 책을 읽어 주는 것은 아이의 즐거움을 위한 것도 있지만, 일찍부터 책을 가까이하여 훌륭한 독서가로 자라기를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다.
OECD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13개국의 15세 청소년을 조사해 본 결과, 부모가 어릴 때 책을 거의 날마다 읽어 주었던 아이들이 독해능력에서 훨씬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아동독서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매리언 울프도 "수 십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부모나 다른 어른이 책 읽어 주는 소리를 들으며 보낸 시간의 양이, 몇 년 후 그 아이가 성취할 독서수준을 예언해 주는 좋은 척도가 된다"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18개월 무렵이 되면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은 아이의 뇌가 청각과 시각 등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연결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초작업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때부터 어른들이 책을 많이 읽어 준 아이는 언어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지고 어휘력도 훨씬 풍부하게 발달한다.
미국의 한 연구는 동화책을 읽어 줄 때 3~5세 아이들의 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알아봤다. 부모가 동화책을 읽어주는 아이는 좌뇌의 PTO(Parietal, Temporal and Occipital lobes) 연결부위가 많이 활성화된 반면,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활성화가 미비했다. PTO는 청각과 시각 등을 통해 얻어진 정보를 처리하고 통합하는 뇌의 영역으로, 특히 언어 습득과 깊이 관련된 부분이다.
부모가 동화책을 읽어 주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는 어휘력 발달에서도 격차가 크게났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앤드루 바이밀러는 유치원 시기에 어휘력이 하위 25%에 속한 아이들은 6학년이 되었을 때 평균적인 또래 아이들보다 어휘력이 약 3년이나 뒤처진다고 한다. 매우 참혹한 결과이다.
어휘력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강하기 때문에, 이런 경향은 학년이 더 올라갈수록 가속화될 가능성이 크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었을 때의 효과는 어휘만이 아니다. 글은 말보다 더 복잡한 문법체계가 필요하다. 책에 씌어진 문장을 자주 들으면서 아이는 문법적 구조에 자연스럽게 눈을 뜨게 된다.
독서 연구가 빅 토리아 퍼셀-게이츠는 아직 글을 모르는 5세 아이들 두 그룹을 관찰 했다. 이 두 그룹은 부모의 교육 수준이나 경제적 지위가 비슷했지만, 한 그룹은 부모가 3~5세 시기의 2년 동안 일주일에 5회 이상 동화를 읽어 준 아이들이고, 다른 그룹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생일파티 같은 개인적인 이벤트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는 것과, 인형에게 책 읽어 주는 흉내를 내 보라는 과제를 주었다.
연구 결과 부모가 동화를 많이 읽어 준 아이들은 특별한 문어체가 들어 있는 관계사절을 이용한 긴 문장을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복잡한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으로, 후에 뛰어난 독 서가가 되기 위한 튼튼한 초석이 된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책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신시내티 어린이 병원의 존 허튼 박사에 의하면, 책 읽는 소리를 듣는 아이의 뇌에서는 시각을 담당하는 부위가 매우 활성화되었다. 아이는 귀로 듣는 책의 내용을 심상의 이미지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나는 이 내용을 보면서 내 딸아이를 떠올렸다. 딸아이는 어릴 때 생소한 방법으로 내게 의사를 전달하곤 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옆으로 와서 신난 표정으로 그림 한 장을 주는데, 때로는 사랑을 뜻하는 하트 모양, 때로는 스포츠단에서 일어났던 이야기, 때로는 장난감이 그려져 있었다. 이럴 때는 장난감을 사 달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여섯 살이 되더니 좀 달라졌다. '아빠, 고영상, 서랑해'라고 쓰여진 편지를 준다. 문자를 몰랐을 때에는 미술관이었던 아이의 머리가 문자를 알게 되면서 도서관으로 바뀌는 듯했다. 상상력은 지식과 논리로 바뀐다. 난 요즘 딸아이가 옛 모습을 잊지 않기를 바라며, 그림 편지를 써 달라고 조르곤 한다.
부모가 읽어야 아이가 읽는다
부모가 아이들의 독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바로 부모가 독서를 즐기는 것이다. OECD 연구에 의하면 국적이나 부모의 소득에 상관없이 부모가 독서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들은 따라 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이런 연구 결과가 나온 이유는 두 가지 정도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모방이다. 인간의 뇌에는 거울 뉴런이 발달되어 있다. 즉 모방이 능숙할 수 있게 프로그램되어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보고 듣는 많은 것들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부모가 책을 읽는 모습을 자주 본 아이는 자연스럽게 부모의 모습을 따라 할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 이유는 환경 조성이다. 책을 읽지 않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하고자 할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거실에서 TV를 치우고 책장을 놓는 것이다. 이는 아이들에게 책에 더 많이 노출되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독서를 많이 하는 부모의 집은 책이 많을 수밖에 없다. 신영복 선생 은 명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사람은 그 부모보다 그 시대를 닮는다"고 했다. 사회과학서를 읽다 보면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시대보다 부모를 닮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있으니 바로 독서이다. 결국 부모 본인은 독서가가 아니면서 아이들에게 독서를 강요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아이는 사랑을 읽는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부모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 주는가보다, 아빠나 엄마 품에 안겨 책 속의 새로운 세상에 동참하는 그 자체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왜 부모의 품에서 책을 읽었던 아이들이 후에 훌륭한 독서가가 되었을까? 나는 독서가 자연스레 부모의 사랑을 연상시키는 정서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독서를 통해 사랑을 느 낄 때, 독서를 사랑하게 된다.
'다독' 편에서 살펴보았듯이, 글자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은 5세 아이에게 억지로 글자를 가르치면 역효과가 난다. 간혹 책을 읽어 주었더니 아이가 글자를 자연히 깨우쳤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아이가 준비가 안 되었는데도 일찍 공부를 가르치고 압박할 경우 아이에게는 글을 읽는 것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자리 잡는다. 또한 부모는 책을 읽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도록 압박하는 상황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최근 들어 초등학생의 독서량이 크게 증가하여, 연평균 20권 수준에서 이제는 70권을 넘어섰다. 하지만 성인의 독서량은 변함없이 열 권 내외이다. 어떤 부작용이 나올지 심히 우려되는 부분이다.
독서를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책을 읽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내가 아이들의 감정에 관심을 둔 이유는 그것에 있다. 우리는 흔히 감정을 배제하고 합리적으로 선택하라는 말을 하지만, 이 말은 틀렸다. 감정이 없으면 선택 자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엘리엇이라는 남자는 뇌에 종양이 생겨 전두엽에 손상을 입었는데, 일상생활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신경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테스트를 해보니, 엘리엇은 지능지수가 상당히 높고 기억력도 탁월했다. 하지만 지진, 화재, 교통사고 등 끔찍한 사건 현장의 사진을 보여 주었을 때,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끔찍한 사진을 보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감정 자체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감정을 잃어버리자 '선택'을 하지 못했다. 높은 지능지수를 가졌음에도, 선택을 할 때는 어쩔 줄 몰라서 허둥댔다.
전두엽을 다친 이런 환자들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핵심 부위인 복내측 전전두엽피질(vmPFC)에 손상을 입은 것이다. 다마지오의 연구는 선택을 하기 위한 합리적 추론은 감정이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우리는 정서를 일종의 정보로 활용한다"라고 말한다. 뇌라는 판사는 판결을 내릴 때 감정을 필수적인 증거로 여긴다는 것이다.
부모의 따뜻한 품에서 다정다감한 목소리를 들으며 책을 보았던 아이들의 뇌는 분명히 책을 본다는 것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연결시켜 놓았을 것이다. 아이 스스로는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책 속에 사랑이라는 책갈피가 꽂혀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느끼며 책을 펼쳐 나갈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사랑을 읽고, 그 사랑으로 책을 읽는다.
[출처] 아이들의 독서 : 아이는 부모를 통해 읽는다|작성자 그녀생각